원치 않을 때 사고, 갈망할 때 내놓는다 [김지은의 아트 레이더]

(2) 현대미술사를 움직이는 빅컬렉터 래리워시
만배로 돌아온 컬렉팅의 비결

바스키아의 원조 컬렉터이자 미술 시장의 설계자로 불리는 래리 워시(Larry Warsh). 작품명은 ‘무제(Untitled), 1986’.  (‘숨프로젝트 제공, 강총명 스튜디오 촬영)
바스키아의 원조 컬렉터이자 미술 시장의 설계자로 불리는 래리 워시(Larry Warsh). 작품명은 ‘무제(Untitled), 1986’. (‘숨프로젝트 제공, 강총명 스튜디오 촬영)

생산된 지 40년이 훌쩍 넘은, 낙서투성이의 고장 난 냉장고가 요즘 ‘핫’하다. 모시기 힘든 귀한 몸이 된 이유는 낙서의 주인공들 때문이다. 장 미셸 바스키아, 키스 해링, 팹 파이브 프레디 등 1980년대 미국 스트리트 아트 거장들과 힙합 스타들의 태깅(Tagging, 이름 꼬리 붙이기)으로 꽉 차 있다. 언더그라운드 영화계의 뮤즈 패티 애스터가 주인이었던 뉴욕 이스트 빌리지 1호 갤러리 ‘펀 갤러리(Fun Gallery)’ 한구석에 놓여 있었다.

이른바 ‘재미있는 냉장고(Fun Fridge)’. 문뿐 아니라 측면까지 낙서로 뒤덮여 3D 입체 캔버스를 방불케 하는 이 냉장고는 ‘거리의 아이들’의 방명록이자 공동 캔버스였다. 1980년대 뉴욕의 힙합·그래피티·클럽·갤러리가 서로를 증폭시키던 집단적 에너지를 그대로 보존한 타임캡슐을 소장한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바스키아의 원조 컬렉터이자 미술 시장의 설계자로 불리는 래리 워시(Larry Warsh)다. 그가 소장했다는 이력만으로도 작품가에 프리미엄이 붙는, 이른바 ‘워시 효과(Warsh Effect)’의 주인공이다. 그가 냉장고를 사들인 것은 1982년, 이들이 스타가 되기 훨씬 전이었다.

2024년 소더비에서는 키스 해링의 ‘지하철 드로잉’ 31점이 예상가를 30% 이상 웃도는 총 920만달러(약 130억원)에 전량 낙찰됐다. 체포를 무릅쓰고 지하철역 빈 광고판 검은 종이에 분필로 기습적으로 그린 현장 작업은 대부분 소실돼 원본 자체가 극도로 희귀하다.

2015년 브루클린 미술관 전시 이력에 소장자가 래리 워시이니, 진위 여부는 물론 최고 수준의 관리 상태라는 신뢰가 가격에 반영됐다. 워시는 공공장소인 지하철을 캔버스 삼아 ‘누구나 볼 수 있는 예술’을 구현한 해링의 가치를 일찌감치 알아봤다. 물론 작가가 뜨기 전이다. 그리고 40년을 기다려왔다.

2017년 바스키아의 1982년 작 ‘무제(해골)’가 소더비에서 1억1050만달러(당시 환율로 1248억원)에 낙찰됐다. 워시는 같은 해 제작된 동일 사이즈의 작품 ‘턱뼈(Jawbone)’를 당시 단돈 1만달러(약 1300만원)에 구입했다. 1만 배가 되어 돌아온 가격표. 하지만 워시가 본 미래는 페인팅만이 아니었다. 바스키아 사망 직후, 그는 작가가 남긴 평범한 노트 8권을 사들였다. ‘가장 사적이면서도 시적인 생각의 집’임을 직감한 것이다. 총 160쪽 분량의 이 노트 가격은 당시 ‘현대 제네시스 한 대 값보다 아래’였다. 이 노트와 냉장고, 그리고 다른 대작들과 함께 워시가 직접 서울을 찾았다. ‘장 미셸 바스키아: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적 기호들’ 전시에 기꺼이 작품을 대여한 이유는 전적으로 이번 전시의 독창적인 기획력 때문이었다.

문뿐 아니라 측면까지 낙서로 뒤덮인 ‘재미있는 냉장고(Fun Fridge)’는 뉴욕 이스트 빌리지 1호 갤러리 ‘펀 갤러리(Fun Gallery)’ 한구석에 놓여 있었다.  작품명은 ‘Untitled(Fun Fridge), 1982’. (숨프로젝트 제공, 강총명 스튜디오 촬영)
문뿐 아니라 측면까지 낙서로 뒤덮인 ‘재미있는 냉장고(Fun Fridge)’는 뉴욕 이스트 빌리지 1호 갤러리 ‘펀 갤러리(Fun Gallery)’ 한구석에 놓여 있었다. 작품명은 ‘Untitled(Fun Fridge), 1982’. (숨프로젝트 제공, 강총명 스튜디오 촬영)

“이번 서울 전시는 바스키아를 ‘1980년대 뉴욕’이라는 지역적 레이블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회화로만 소비되던 그를 ‘기호의 계보’ 속으로 재배치했죠. 반구대 암각화에서 훈민정음, 추사로 이어지는 한국의 기호사와 병치한 구성은 바스키아의 언어를 인류 보편의 기호사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워시 소장의 노트북 8권이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된 전시실 ‘단어의 신전’에서는 노트에 쓰여진 단어들을 소리 내 보고, 거대한 캔버스 위 ‘백학’과 ‘박쥐’ 사이 아직 풀리지 않은 기호를 해독하려 오래 머무는 관객들이 눈에 띄었다. 작품 앞에 10초 이상 머물기 힘든 요즘 보기 드문 현상이다. 거리의 낙서가에서 ‘언어의 조형가’로 새롭게 정의된 바스키아를 만나는 순간이다.

“시서화 문화에 근간을 둔 우리 예술은 ‘그리는 회화’가 아니라 ‘쓰는 회화’이고, 바스키아는 이를 뉴욕 거리에서 실현했습니다. 이번 전시는 문자와 회화의 관계를 다시 묻는 시도입니다. 과잉 정보의 시대에 누구나 직관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언어는 무엇인지, 그가 남긴 낱말 속에서 언어의 본질을 되묻게 됩니다. 그의 예술은 완결이 아니라 과정이며, 읽는 것이 아니라 듣고, 보고, 느껴야 하는 언어입니다.”

9개국 40명의 개인 컬렉터들에게 미술관급 작품의 대여를 이끌어낸 전시총괄 이지윤 큐레이터의 말이다. 바스키아의 기호체계를 동서양의 ‘해석학적 교차’를 통해 새롭게 읽으려는 기획이 빅 컬렉터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워시에게 신진 컬렉터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가격을 보지 말고 ‘미술사’를 보십시오. 저는 지금과는 매우 다른 시대에 미술품을 사기 시작했지만, 늘 열정과 직관을 갖고 이 예술가들이 미래에 왜 중요한 존재가 될지 비전을 고민하며 수집했습니다. 특히 ‘글로벌한 예술 담론’에 기여하는 작품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작품을 수집할 때는 언제나 그 작품이 가장 빛날 최종 무대까지 염두에 둡니다. 이번 ‘단어의 신전’처럼 말이죠.”

워시는 단순한 수집가를 넘어 예술가의 생각과 언어를 엮어내는 기획자로도 유명하다. 바스키아, 워홀, 웨이웨이 등의 어록을 담은 ‘isms 시리즈’의 편집자로서 작가의 철학을 세상에 전파해온 그는 요즘 트레이시 에민, 바바라 크루거 등 파워풀한 여성 아티스트들과 작업한 희귀 컬렉션 ‘아트카(Art Cars)’에 집중하고 있다. 운전면허도 없는 뉴요커의 자동차 컬렉션이라니.

“저의 관심은 자동차 자체가 아니라 예술·팝컬처·자동차가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이 컬렉션 전체가 50년 뒤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저에게는 더 중요합니다. 저는 ‘지금’이라는 시간을 모으는 중입니다.”

안목과 시간이 결합할 때 미술사는 새롭게 쓰이고, 각주로 처리될 작품 가격 역시 안목이 증명해낸 역사적 기록의 일부가 된다. 기억하자. 그는 아무도 원치 않을 때 작품을 모았고, 누구나 갈망할 때 비로소 세상에 내놓으며 예술의 가치를 높여왔다는 사실을.

김지은: 방송인 , ‘디어 컬렉터’ 저자

출처:  매경이코노미 제2345호 (2026.01.28~02.0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