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25]지루한 도시에서 쿨한 서울로… ‘헤더윅 전’ 기획한 이지윤 숨 프로젝트 대표

문화역서울284. 기차역의 기능을 마친 옛 서울역사가 2011년 복합문화공간으로 변모하면서 새롭게 얻은 이름이다. 284는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번호. 남대문역-경성역-서울역으로 명칭을 바꿔가며 100년 가까이 이 자리를 지킨 역사(1925년 준공)가 요즘 강북에서 가장 ‘힙’한 장소로 떠올랐다. 9월 6일까지 열리는 ‘헤더윅 스튜디오: 감성을 빚다’전이 건축·디자인 분야 종사자와 전공자들 중심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평일엔 하루 평균 1000명, 주말엔 1500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아오고 있다.

토마스 헤더윅(Thomas Heatherwidck·1970년생)은 누구인가. ‘세계적인 디자이너이자 건축가’ ‘영국의 다빈치’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낯설다. 아직 한국에서 ‘헤더윅 스튜디오’가 설계한 건축물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강원도 양양 설해원 리조트 안에 짓고 있는 뮤지엄 ‘더 코어’와 서울의 ‘노들섬 프로젝트’ 공모전에 출품한 ‘소리풍경(Soundscape)’ 설계 모형 정도가 있을 뿐이다.

‘씨앗 대성당’과 움직이는 2층집

기능성과 재미를 동시에 제공하는 스펀 체어. 누구든 이 의자에 앉으면 빙글빙글 돌거나 뒤로 한껏 젖히며 즐거워한다. 전시장에서 스펀 체어를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헤더윅은 전 세계 곳곳에서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경이로운 건축물을 선보이고 있다. 헤더윅 스튜디오를 전 세계에 알린 2010년 상하이 엑스포 영국 파빌리온(가설건축물)부터 보자. 당시 영국 정부의 요구 조건은 엑스포에서 상위 5위 안에 드는 건축물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헤더윅은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7.5m 길이의 아크릴 막대를 만들고 그 끝에 25만 개의 씨앗을 박았다. 이렇게 제작된 6만여 개의 아크릴 막대를 큐브에 꽂아 마치 거대한 고슴도치 같은 건축물이 탄생했다. 낮에는 투명 막대를 통해 밖에서 빛이 흘러들어 오고 밤에는 내장된 인공조명이 외부로 빛을 발산하며, 바람이 불면 긴 아크릴 막대가 머리카락처럼 살랑거리는 일명 ‘씨앗 대성당’이 세워졌다. 영국관은 엑스포가 열리는 6개월 동안 700만 명 이상이 다녀가는 대성공을 거뒀고 파빌리온 디자인 부문 금메달을 수상했다.

2012년 열린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헤더윅은 전 세계 수백만 명의 관객에게 잊지 못할 장면을 선사했다. 204개 참가국 선수들이 하나씩 들고 입장한 구리 꽃잎 형태의 성화봉이 점화 후 천천히 세워지면서 하나의 거대한 불꽃을 이루는 장관을 연출한 것. 올림픽 기간 그가 새롭게 디자인한 빨간 버스가 런던 시내를 누빈 것도 화제였다. 당시 보리스 존슨 런던 시장은 헤더윅에게 1947년 처음 만들어진 런던의 명물 루트마스터 버스를 리뉴얼해달라고 요청했다. 유모차나 휠체어 이용자를 비롯해 모든 승객의 승하차 시간을 최소화하고 기존 버스보다 화석연료를 40% 적게 사용하며 동시에 경제적이면서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운 버스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그는 디자인으로 해결했다. 헤더윅은 루트마스터 버스 프로젝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012년 리뉴얼한 런던의 명물 2층 버스 ‘루트마스터’.

“버스가 아니라 움직이는 2층집을 만든다고 생각했죠. 그것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집이자 퍼플릭 아트를 만들었더니 싫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2019년 미국 뉴욕에 세워진 ‘베슬’은 단숨에 새로운 명소로 떠올랐다. 인도 라자스탄의 우물에서 영감을 받은 이 16층짜리 철강 전망대는 계단과 넓은 층계참이 반복되면서 기하학적인 시각 효과를 만들어낸다. 관람객들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허드슨강과 맨해튼을 가로지르는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2021년 허드슨 강변에 조성된 ‘리틀 아일랜드’도 공공건축물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80개의 거대한 깔때기 모양 구조물에 다양한 나무와 식물을 심어 만든 이 물 위의 정원은 뉴욕 시민들의 산책로이자 야외 공연장으로 사랑받고 있다. 2023년 완공된 구글 오피스 빌딩 ‘베이 뷰’는 생산적이고 즐거운 업무 환경을 제공하는 사옥이 지역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공간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아이디어가 곧 목적이자 스타일

2023년 완공된 구글 오피스 빌딩 ‘베이 뷰’ 전경.

“스타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헤더윅은 이렇게 대답했다.

“한 가지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에게는 아이디어가 더 중요하지요. 아이디어가 프로젝트의 목적성을 형성하고 스타일을 결정합니다. 저는 건축가가 각자의 특색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건축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작업하고 있는 공간을 존중하고 해당 건물에서 생활하게 될 사람들을 염두에 두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사람들이 느끼게 될 감정에 더 관심을 가지는 편입니다. 다양한 소재, 형태, 기술 그리고 디테일을 활용함으로써 사람들의 감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걸 스타일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죠. 우리 모두 다양성이 더 많이 존중받는 세상을 원하지만, 지금까지는 어디를 가나 지나치게 획일적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도시가 지루한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저희 헤더윅 스튜디오는 특색 있는 작업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특색 있다는 것이 하나의 스타일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죠. 저희는 프로젝트 하나하나를 주변의 따분한 건물들과 차별화하여 매력적이고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분한 건물, 지루한 도시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헤더윅의 스타일이다. 2015년 싱가포르 난양 이공대학의 러닝 허브, 2017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의 곡물저장소를 리모델링한 자이츠 아프리카 현대미술관, 2020년 영국 리즈의 암환자 센터인 ‘매기스 요크셔’ 등 그가 손을 댄 건축물마다 그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헤더윅 스튜디오는 2016년 디뮤지엄에서 소규모 전시를 한 적이 있지만 30개의 프로젝트를 한꺼번에 선보이는 대규모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국내 전시는 앞서 진행된 도쿄 모리미술관 전시보다 2개의 프로젝트가 추가됐다. 무엇보다 헤더윅은 100년 가까이 된 옛 서울역사에서 열리는 전시라는 점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사람이 이지윤 숨 프로젝트 대표다.

이 대표는 2003년 런던에서 ‘숨 프로젝트’를 설립하고 국제 현대미술 전시 및 프로젝트를 50회 이상 기획한 베테랑 큐레이터다. 2000년 런던 대영박물관 내 한국관 설립 코디네이터, 2005년 덴마크 왕립미술관 샬롯텐버그 ‘서울언틸나우’전, 2010년 사치갤러리 ‘판타스틱 오디너리’전, 2012년 런던 올림픽 IOC 커미션 ‘블루크리스털 볼’전, 2014년 DDP 개관 ‘자하 하디드 360도’전, 2021년 예술의전당 ‘BVLGARI COLORS’전, 2021년 런던 180스튜디오 ‘럭스(LUX): 새로운 현대미술의 물결’전 등을 기획했다. 2014년부터 3년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운영부장으로 일했고 큐레이터이자 미술사학자, 교육자로서 유럽과 한국의 현대미술을 이어주는 가교 노릇을 해왔다. 이번 ‘헤더윅 스튜디오: 감성을 빚다’전은 한영 수교 140주년, 헤더윅 스튜디오 설립 29주년, 숨 프로젝트 설립 20주년을 맞아 각각의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의미를 담고 있다.

뉴욕 전망대 ‘베슬’

런던 올림픽 성화대(왼쪽). 상하이 엑스포 영국 파빌리온

싱가포르 난양 이공대학 ‘러닝 허브’.

한국에서 생소했던 헤더윅이 이번 전시로 많이 알려졌습니다.

예전에 사람들이 뉴욕에 가면 제일 먼저 ‘자유의 여신상’을 찾았지만 지금은 ‘리틀 아일랜드’로 가요. 런던에서는 ‘빅뱅’을 보러 갔지만 지금은 루트마스터 버스를 타러 갑니다. 헤더윅은 각 도시의 시그니처가 될 작품을 남기고 있어요.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보고 싶어서 그 도시를 찾아가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전시회에 옵니다. 토마스 헤더윅은 건축계의 BTS 같아요.

평일 오전인데도 줄을 서서 입장하는군요.

관람객의 80% 이상이 2030 청년들이라는 점에서 고무적입니다. 건축 전시는 기본적으로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어서 흥행에 성공하기 힘들다고 하죠. 그런데 젊은 관객들이 전시를 대하는 자세가 너무나 진지해요.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만 찍고 떠나는 게 아니라 전시회 설명문을 꼼꼼히 읽고 비록 모형이지만 안쪽의 공간 디자인까지 살펴보고자 몸을 구부려서 감상하는 모습에 감동받았습니다. 하루 4차례 하는 도슨트 프로그램도 입소문이 나면서 점점 더 많은 분이 참가하고 있어요. 한국에서 도록을 만들어 1000부를 찍었는데 순식간에 다 팔렸어요. 헤더윅 스튜디오는 지금까지 한 번도 도록을 만든 적이 없다고 해요.

헤더윅과 오랜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2008년 처음 만났을 때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감탄했죠. 이 사람은 그냥 건축가가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해법을 찾는 디자이너구나 싶었습니다. 그것을 예술과 접목하는 것은 저 같은 기획자의 역할이고요. 2012년 런던 올림픽 때 빅토리아·앨버트미술관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전시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고, 이후 한국에도 헤더윅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건축은 실현되는 데 10년씩 걸리기도 해서 이번에 소개된 30개의 프로젝트가 나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됐죠.

왜 지금 헤더윅 전시가 화제일까요.

도시와 예술이라는 맥락에서 창조의 근간이 될 질문을 던지고 그 해법을 찾아내는 작가가 바로 토마스 헤더윅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이번 전시를 앞두고 저와 나눈 대담에서 “온실가스 배출의 40%가 건축업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며 평균수명 20년짜리 건물을 짓는 것, 지루한 건물을 또 다른 지루한 건물로 대체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고 했습니다. 현대적인 것보다 인간적인 것을 추구하며 도시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그의 말에 공감합니다.

K-아트, K-아키텍처의 시대가 온다

‘헤더윅 스튜디오: 감성을 빚다’ 전 개막에 맞춰 방한한 토마스 헤더윅(왼쪽)과 이 전시의 한국 큐레이 터인 이지윤 숨 프로젝트 대표. 전기차 ‘에어로’ 모델이 전시된 중앙홀에서.

이번 전시가 한국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전 세계적으로 K-뮤직, K-드라마, K-영화가 주목받고 있는데 다음은 K-아트, K-아키텍처가 돼야죠.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집권하면서 “새로운 노동당, 새로운 영국”을 부르짖으며 내걸었던 구호 “쿨 브리타니아(Cool Britania·멋진 영국)”처럼 한국이 ‘헬 조선’이 아니라 ‘쿨 코리아’ ‘쿨 서울’이 돼야 합니다. 헤더윅을 한국에 소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제가 더 의미를 두는 것은 넥스트 제너레이션에게 새로운 아이디어의 발상이 어디에서 오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수많은 관람객 중에 헤더윅 같은 사람이 딱 한 명만 나와도 이 전시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K-아트에 대해 덧붙이자면, 저는 ‘미디어아트’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비록 오일 페인팅 분야는 서양이 먼저 시작했지만 미디어아트는 출발선이 똑같다고 보거든요. 우리에겐 백남준을 필두로 김치앤칩스, 이이남, 박제성, 강미현처럼 이미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많습니다. 새로운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지원해서 글로벌 작가로 만들어야죠.

숨 프로젝트의 ‘숨’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문득 ‘집’이 떠오른다. 지붕과 기둥과 사람이 머물 공간이 하나의 글자 안에 다 있다. 이지윤 대표는 ‘숨’의 의미를 묻는 사람들에게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일하는 오피스”라고 설명한다.

“미술은 그 시대의 역사와 철학의 산물이에요. 그 시대에 가장 앞서나가고 독창적인 생각에서 작품이 탄생하죠. ‘숨’은 크리에이티브한 생각과 사람과 작품이 모이는 집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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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숨 프로젝트}